밖에선 성자, 집에선 악마
교회 안에서만 하나님을 예배하고 교회를 벗어나면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에서의 나와 집에서의 내가 다르기까지 합니다.
물론 우린 범사에 우리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한다지만 이런 이원론적인 신앙은 신앙과 삶을 분리하는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과 연관이 없고 너무나 오래 철저히 이중적인 삶을 살기에 교회 안에서는 좋은 성도로 보이지만 심지어 사회에서는 지탄을 받고 무기력하며 인정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로마서 12장 1절에서 우리 삶의 전부가 예배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직업은 거룩한 부르심에 합당한 성직(거룩한 직업)이고, 우리가 있는 늘 생활하는 삶의 영역은 모두 성소(거룩한 장소)이며 우리 삶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 올려 드려야 할 거룩한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천국은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내가 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바로 그이고, 그가 바로 내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한 걸음 더...
하나님의 그 거룩한 성품과 인도하심에 순종하며 살기를 소망해 봅니다.
또 이렇게 잊혀져만 갑니다
우린 정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부모와 자식으로 만납니다.
그렇게 만난 첫 만남이 서로가 익숙하지도 능숙하지도 않다보니 일정 시간이 지날때 까지 무수히 많은 시행착오를 겪습니다.
부모라고 해서 모든 것을 이미 다 알고 있던 것도 아니고, 자녀는 더더욱 미숙하기에 함께 미숙한 부모에게도 너무나 많은 상처와 아픔을 줍니다.
그러다 어쩌다 조금 철이 들면 한시적으로 부모의 가치와 의미를 깨닫게 되지만 이 또한 현실과 감정이 더 앞서기에 이내 곧 그 가치를 잊기 십상입니다.
이젠 어느정도 알겠다 싶던 어느날, 솔직히 말하면 여전히 전혀 알지 못하던 때에 갑자기 떠난 부모님과의 이별은 실제로 해내지도 못할거면서 아쉬움만 남기고 추억 속에 점점 더 희미해져만 갑니다.
시즌이면 또 다시 찾아와 둔감해진 머리에 깨달음을 주는 부모님의 그 은혜...
하지만 그 은혜도 잠시, 자녀라는 또 다른 전혀 새로운 대상을 향해 모든 사랑과 열정을 쏟아부어야 하는 이 현실이 부모를 향한 사랑보다 더 크기에 언제 그랬냐는 듯 또 다시 잊혀져만 갑니다.
높고 높은 하늘이라 말들 하지만
나는 나는 높은 게 또 하나 있지
낳으시고 키우시는 어머님 은혜
푸른 하늘 그보다도 높은 것 같아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풍성함
하나님의 풍성함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최상의 기쁨을 누렸을 때를 비교하면 천상에서 누리는 기쁨은 백배, 천배 정도가 아닙니다.
엄밀히 말해서 이 땅에서의 그것과 천국에서의 그것은 어떤 것으로도 비교자체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우린 이러저런 방법을 총동원하여 천국에 대한 이해를 도전해 보려고 애쓰곤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풍성함은 수치로 잴 수 없습니다.
이는 우리가 생각하고 계산하고 비교할 수 있는 그 어떤 기준안에 갇히는 비교군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기쁨, 그리고 우리가 앞으로 만날 하나님의 그 풍성함은 계량의 범위 그 한계를 넘어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한 은혜”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영의 눈과 마음의 눈이 열리지 않으면 그 하나님의 축복과 생각을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이번 한 주간은 또 내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내 주변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주위를 둘러보면 온통 범사에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그 뜻이 숨어 있습니다.
우린 그 뜻을 조금씩 조금씩 발견하고 알아가는 한 주가 되어야겠습니다.
나만의 측정 도구
누가복음 18장에 소개된 바리새인은 다른 사람들과 자신들을 비교하며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않다’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자신은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한다’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가 볼때는 다른 사람들은 다 죄인이지만 자신들만 죄인이 아닌 거룩한 사람임을 자부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비록 바리새인으로서 구별된 삶을 산다고는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결코 완전할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자기의를 드러내어 스스로 의인임을 자랑했기 때문입니다.
우린 분명 예수님을 믿기 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다르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지금 나의 변화된 이 모습은 내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린 누구라도 언제든 옛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으며 지금의 그 변화된 모습조차도 완벽하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우리의 이처럼 연약한 판단과 모습에 대해 아주 오래전 종교개혁자 마틴루터는 다른 사람의 죄를 기준 삼아 나의 거룩함을 측정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오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누군가를 판단하고 정죄하기 위해 만들어진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