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살이 다 똑같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과 일반생활이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보니 평소의 나와 교회에서의 내가 점점 더 차이가 생겨가는 자신을 보지 못하는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언어도 그리고 눈빛도 우리는 굳이 달라야 할 이유가 없는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꾸 다름을 선택하곤 합니다. 
삶이 힘들다고 느껴질 때 신앙생활도 힘겹다 느끼게 되고, 반대로 신앙 생활이 즐거워 지면 삶도 기쁨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은 환경도 아니요, 타인의 압력도 아닌 내 자신의 선택에서 옵니다. 
지구촌 팬더믹(질병 대유행)은 단순히 역병의 영향력을 너머 우리 모두의 생활패턴과 심지어 생각까지 바꿔 버렸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바꾼 것은 결코 그러한 '질병'이 아닙니다. 
단지 유행하는 질병을 통해 우린 이미 갖고 있는 우리의 가장 약한 모습을 서로 보게 된 것입니다. 
개인의 생각과 삶의 패턴, 심지어 신앙생활의 기준도 그간 감추어졌던 모든 것을 다 보여주기에 충분했고, 이러한 노출은 이제 겨우 시작이라는 것이 더 두려울 뿐입니다. 


믿음의 경주는 결코 우리의 생활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실전입니다. 
이러한 실전 앞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더 이상 감출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현실과의 한판 승부입니다. 
지난 과거 믿음의 선배들이 그 시대 속에서 겪었던 문제들과 지금의 내 문제는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세상살이 다 똑같습니다. 
나만 더 다르다고 생각할때 사람은 누구나 핑계와 이유가 생깁니다. 


지금의 나를 해석하고 극복하고 답을 얻는 유일한 길은 우린 모두 같은 상황을 극복하고 풀어가는 <영적 수험생>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도

사울왕에게 쫓기던 다윗은 한때 아내 ‘미갈’의 기지로 집에서 탈출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사무엘’이 머물고 있는 {라마 나욧}으로 피신하지요. 
하지만 해 아래 안전한 장소는 없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사울이 곧바로 [암살단]을 보내게 된 것입니다. 
그것도 한번이 아닌 무려 '세 번'이나 말이죠.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다윗을 잡으러 라마나욧으로 들어간 [암살단]이 다윗을 잡아 오기는 커녕 성령에 감동되어 그곳의 선지자 무리와 함께 예언을 하고 앉아있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암살단이 집회 성도>가 된 격이죠. 
 
너무나 화가난 사울은 본인이 직접 그 곳으로 향합니다. 
직접 가서 다윗뿐만 아니라 명령을 어긴 암살단 전체를 몰살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라마나욧으로 떠난 것이죠. 
 
그런데 사울이 사무엘이 기거하는 라마 나욧의 지경에 들어오자마자 그도 역시 이상한 영적인 체험을 경험합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이 가진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영적인 영향력>인 것이죠. 

<곁에만 있어도> <함께만 있어도> 변화를 경험하는 영향력...
다윗은 쫓기는 자의 삶, 급격한 위기 속에서도 그랬다면 지금 우리의 삶에서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믿습니다. 

오늘부터 그 영향력을 도전하는 우리 온세대 가족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사람은 늘 같은 문제로 넘어집니다.

로마서가 기록될 당시 로마교회 교인들은 아마 전혀 다른 환경 속에서 상호간에 보이지 않는 갈등구조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교회라는 공동체'는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의 문제가 끊이지 않고 발생하지요. 
문제는 이 사람들 간의 관계가 개인의 신앙의 문제까지 영향을 준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린 교회 공동체에서 껄끄러운 상황을 만나거나 혹은 그러한 관계성들을 접할 때, 그것 때문에 보다 깊이 있는 은혜의 교제권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느낍니다. 
대부분 성도들은 믿음보다 신앙보다 요 '감정의 문제'에서 헤어나오지 못합니다. 
우리를 성숙케 하지 못하고 늘 정지 상태에 머물게 만드는 그 영적인 고집으로부터 빠져나와야 되는데,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니까 자꾸 환경만 바꿔가며 요리조리 피해다니는 분들이 주변에는 많습니다. 
그래서 잘 보면, 사람에게 상처받아 교회를 옮긴다거나, 혹은 어떤 어려움이 와서 신앙생활을 중도에 포기하시는 분들도 생기곤 합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정말 중요한 문제를 발견하게 됩니다. 
즉, 대부분 늘 같은 문제를 동일하게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만의 반복적 패턴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문제는 비단 교회 뿐만아니라 가정과 사회생활, 인간관계 전반적인 측면에서 발생합니다. 
교회는 분명 모두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유일한 대안입니다. 
하지만 각자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교회는 아닙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이해할 때 가정도 사회도 동일한 해석과 이해가 가능하게 됩니다. 
앞선 이해가 없을때... 사람은 무조건적으로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부분만 강조되어 모두를 망가뜨리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이 땅의 교회는 완벽하지만 사람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의 몸된 모든 교회는 아름답지만 사람은 때론 추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정확한 교회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무척 혼란스럽고 늘 아픈 상처들의 이야기만 가는 곳마다 늘어놓게 됩니다. 
그래서 건강한 교회는 각각의 사람들의 그 약함을 이해해주고, 기다려주고, 섬겨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타협할 수 없는, 또는 타협해선 안되는 [진리]라는 분명한 기준과 선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도 신앙의 포부를 크게 가지고 어떤 관계적 어려움과 상황적 난제들을 만난다 할찌라도 오직 말씀 붙들고 하나님만 바라보며 승리하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내게도 사명이 있는가?

솔로몬 이후에 남북이 갈라진 이스라엘은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로 분열되어 철저히 세속화 됩니다. 예레미야가 활동하던 당시 사람들은 그 전에도 그랬지만 대부분 하나님을 떠났고 순종하지 않는 삶이 더 자연스러웠습니다. 
더군다나 당시 시대를 호령하던 주변의 열강들이 새롭게 일어났다가 망했다가를 반복하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 보다는 그저 주변 열강들의 눈치 보는 것이 어쩌면 더 현실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마치 아무리 말씀대로 살려고 해도 오히려 손해는 더 커지고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거나 오히려 대충 신앙생활하는 이들이 늘 순종을 선택하려고 몸부림 치는 나보다 더 잘되는 모습을 보며 오히려 그나마 부여잡고 있던 믿음마저 눈 녹듯이 녹아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안믿고 오히려 날라리로 살다가도 아무일 없었던 것처럼 시집들 잘 가고, 교회 열심히 빠져도 승진만 잘 되는 현실 앞에 나도 모르게 자꾸 믿음이 작아져 가고 식어져 가는 그런 마음처럼...
그러니 아무리 제사장의 아들이지만 예레미야는 그런 현실 앞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는 부담은 스스로 '아이'라 말하고 자꾸 '사명 떠넘기기'에 급급했던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피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자기가 가진 하나님을 향한 믿음보다 사람들의 마음 깊숙이 자리잡고 있던 불순종과 무관심의 무담이 더 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로마서 11:29]은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그가 누구라도 결코 후회가 없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완전한 하나님의 완전한 부르심 앞에 누구도 핑계댈 수 없다는 것이지요.
어차피 우리의 능력으로 이 땅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하는 것 아닐까요?
이 세상을 살면서 우린 나의 우매한 선택 때문에 고생을 해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자녀된 신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확인하고 살아가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에 예레미야를 부르듯이 우리를 부르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땅에 그냥 우연히 태어난 존재는 없습니다. 


누구나 다 이 땅에서 살다 호흡이 멈추는 그 순간까지 사명은 존재 합니다. 
그것이 누가 볼 때 하찮은 것이나, 혹은 대단한 것이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는 큰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도 우린 그 사명을 인식하고 내게 주어신 일들을 충실히 감당하는 그런 멋진 삶이 되어야 겠습니다. 

‘믿음'과 '민족애'는 함께 갑니다

올해는 광복 75주년이 되는 해 입니다. 
지난 75년이라는 시간은 민족과 개인 모두에게 다양한 경험을 가져다 준 결코 잊을 수 없는 시간이었습니다. 
그 누구 하나 민족의 아픔과 설움 그리고 자유를 갈망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아품과 설움을 자유로 바꾸기 위해서 첫 모임을 갖고 구체화시켰던 사람은 33명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린 그들을 향해 [민족대표 33인]이라는 칭호를 붙여왔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33인중 기독교인이 무려 16명이나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승려2명과 동학을 계승하여 발전된 한국의 신흥 종교인 천도교 출신입니다. 
물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야 종교를 떠나 믿음과 신앙을 떠나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독 그러한 갈망을 실제로 행동으로 옮겼던 삶은 한국역사와 전세계 역사를 통해 신앙의 가치가 우리의 삶에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명확히 얘기해 주고 있습니다. 
독일이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을 당시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요 목회자인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는 히틀러의 만행을 보고 참을 수 없어서 이런 말을 남긴 것으로 유명합니다. 
"악을 보고도 침묵하는 것은 그 자체가 악이다”
"미친 운전자가 행인들을 치고 질주할 때, 목사는 사상자의 장례를 돌보는 것 보다는 핸들을 뺏어야 한다”
그는 전쟁 내내 끝까지 반나치운동을 벌이며 국민과 세계질서를 파괴하는 불의와 싸우다 1945년 4월 9일 39세의 나이로 차가운 플로센부르크 수용소에서 생애를 마감합니다. 


믿음은 현실입니다. 
먹고사는 것을 우린 현실이라고만 하지 않습니다. 
내가 따르는 신념, 내가 쏟아붓는 열정,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 이 모든 것이 나의 현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당신의 민족이 무엇이든, 당신의 나라가 어디이든 우린 그 민족이 있기에 내가 있고, 그 나라가 있기에 오늘도 나의 위치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그래서 민족과 나라의 소중함을 늘 가슴에 품고 민족과 나라가 어려움에 처할때 갈망만으로 열정만으로 불태우지 않고 실제로 나가 행동하는 삶인 줄 믿습니다. 

끝으로 바울 역시 자신의 민족을 생각하며 로마서를 통해 이런 고백을 남겼습니다. 
(롬9: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칭찬이 주는 힘

1950년대 미국 위스콘신 대학에서 우수한 문학 지망생들의 모임이 하나 생겼습니다. 
그들은 정기적으로 만나 각자가 쓴 소설과 시의 결점들을 가차 없이 서로 비평했습니다. 
물론 더 좋은 작품을 위한 서로의 도전 차원에서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초기엔 그런 비평이 각자의 창작에 도움이 되는 듯 보였습니다.

한편, 또 다른 모임도 하나 있었는데...
이 모임에서는 혹평은 일절 피하고 좋은 부분만 칭찬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후 10년, 이 두 모임은 서로가 완전히 다른 결과를 가져옵니다. 
혹평을 피하고 서로의 좋은 점만 강조했던 모임의 학생들은 대부분 훌륭한 작가가 된 반면에 그토록 유망하던 비평 가득한 모임은 단 한 명의 뛰어난 작가도 나오지 못했습니다. 

물론 100% 다 좋은 사람은 없지요. 
그렇지만 95% 좋은 점만 보면서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5%의 좋지 않은 점만 강조하면서 평생 자신과 남을 비난하고 비판만 하는 사람들도 의외로 많습니다. 

하지만 꼭 기억해야 합니다. 
비난과 비평은 하면 할수록 나쁜 감정이 커지지만, 칭찬과 격려는 하면 할수록 가능성이 커진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누군가를 비난하고 비판하기엔 우리의 인생이 그리 길지 않다는 것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과연 나는 하나님 없이 좀 더 괜찮은 인생이었을까?

하나님으로부터 축복 3종 세트(지혜,부,명예)라는 엄청난 은혜를 받은 솔로몬.
하지만 솔로몬은 시간이 지나며 점점 그것의 출처를 잊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어느새 자신의 능력이 어느 정도 개입되어 그런 성과를 이루어 냈다는 착각에 사로잡히게 되지요.  
 
그렇다면 지금 나의 모습을 돌아볼 때, 혹시 ‘지금 내가 누리고 행하는 것이 내가 살아온 노력과 열정에 비해 훨씬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물’ 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즉 “내가 하나님을 모르고, 그래서 내가 원하는 대로 다 했다면?”  “지금 보다 훨씬 더 멋지고 괜찮은 모습일텐데...” 라고 말이죠? 
 
글쎄요... 지금이 훨씬 더 은혜로운 시절이 아닐까요?
솔로몬에게 있어서 40여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나라를 주변국들로부터 지켜주었던 것은 솔로몬의 지혜가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지만 솔로몬은 시간이 지나며 어느새 자신의 능력을 신뢰했고 하나님은 서서히 잊혀 가는 옛 추억으로 사라져 간 것이죠. 
결국 하나님은 그런 솔로몬으로부터 더 이상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여로보암>   이라는 새로운 인물로 대체됩니다. 
 
정말 무능한 인생을 유능한 인생으로, 무가치한 삶을 가장 존귀한 가치로 만드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선언에 전적으로 동의할 때, 우린 꾸준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 있고 또한 평생에 하나님의 기쁨으로 남는 복된 삶이 됩니다. 

지금 결코 잊지말아야 할 사실이 있지요?
그것은 바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만났기에 소중하며, 하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고백하기에 비로소 가장 존귀한 모습이 된다는 사실. 


이 사실 하나만 잊지 않아도, 분명 지속적인 내 안의 정체성과 영향력은 끊임없이 부어져서 더 나은 삶을 유지하리라 믿습니다.

내 맘대로? 하나님 뜻대로?

사사시대는 왕도 없고 어떤 안정적인 통치세력도 없었던 매우 불안한 시대였습니다. 
그 때는 마치 지금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의 소견대로' '자기 맘대로'로 살기 원했던 것입니다

(사사기21:25). 
살아가는 방법도 자기 맘대로, 신앙도 자기 맘대로...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던 것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현상은 마음에 하나님 두기도 싫고, 자기 자신이 왕이 되어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고픈 열망이 그러한 환경을 자초한 것이죠.

우리가 역사의 현장에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위대한 도구로 쓰임 받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쓰임 받는 시기에 주시는 특별한 은혜(선물)를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헌신된 삶'엔 반드시 이러한 '하나님의 선물'이 따라갑니다. 

부족해도, 연약해도 그 은혜 안에 머무르려는 그 마음만 있으면 그때 그때 허락해 주시는 <선물>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1:8]에 나타나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게 된다’는 그 권능이라는 단어는?
신약성경 번역본엔 (헬라어)듀나미스~ 그리고 그 단어는 엄청난 파괴력과 영향력을 일컫는 영어의 '다이너마이트'로 이어지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 시대에 그 누구라도 바로 이 성령에 인도함을 받으면 <선물>로서 주어지는 '권능'을 동시에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지혜와 영향력으로 이 땅을 살아가도록 부으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죠. 

그 누구라도 하나님이 일하시는 그 현장에 들어가 쓰임 받을 때... 
그 순간 허락되는 특별한 은총(감정적 기쁨, 관계적 기쁨, 상황적 기쁨)을 그가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자격이 안되고, 실력이 안되도,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을 체험하며 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현실과는 반대로 헌신된 삶이 지속될수록 그 사람은 점점 더 크게 쓰임받게 되는 자신도 예상치 못했던 엄청난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이러한 하나님의 쓰임에 온전히 드려지는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특별관리 프로그램

시대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힘겨운 삶을 살게 되는 결정적인 이유는? 대부분 ‘불순종’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잊고 살다보니 불순종을 선택하게 되고, 불순종하다보니 더욱 하나님을 잊고 살게 되는 악순환을 이어가게 됩니다. 

우린 생명이신 하나님을 내 삶에 주인으로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특별관리 프로그램’이 발동합니다. 

끊을 수 없고, 피할 수 없는 그런 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특별관리 프로그램’입니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은 철저히 우리에게 모든 영역에서 선택할 수 있는 무한한 자유의지를 허락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아담)에게 주시는 사랑의 선물입니다. 

하지만 이 선물(자유로운 선택의 의지)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는 하나님의 개입 없이 철저히 내 의지만으로 채워져 가기에 매우 중요하며 동시에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살며 각자 다양한 성격과 기질, 그리고 삶의 형태에 나타나는 그 선물(의지)을 적절히 잘 적용하고 선용한다면 누구나 그 선물 이상의 시너지 효과를 삶을 통해 얻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의 의지는 우리가 아닌, 하나님께 달렸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는 내 자신의 선택에 의해 만들어져 갑니다. 
그것까지도 하나님이 다 결정해 놓지는 않습니다. 
우린 결코 이미 프로그램된 로봇이나 사이보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순종하는 삶을 살다 생애 말년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부름을 받는 반면, 어떤 사람은 순종과 불순종을 지속적으로 반복하다가 결국 주어진 시간과 재능, 역량을 모두 소비한 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기도 합니다. 

우리 온세대 가족들의 삶은 누구보다 복된 선택으로 가득했으면 좋겠습니다. 

스스로에게 주는 가산점

인간은 지난 역사를 돌이켜 볼 때 결코 삶이 어려워서 하나님과 멀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풍족하여 일이 잘 될 때... 고난이 없을 때... 
안타깝게도 그때가 더 하나님과 멀어진 삶을 살았습니다. 

너무 많이 힘들지만 결코 힘들어서가 아닙니다. 
어려워서가 아닙니다. 
내가 원래 약했기에 늘 약한 이유를 찾기에 바빴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스스로에게 너무 많은 가산점을 주면 안됩니다. 
오히려 더욱 냉정하고 분명하게 우리 자신을 분석하고 판단해야 합니다. 그래야 구체적인 방법이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블레셋의 40년 억압,
그때에 삼손이라는 전혀 준비되지 않은 한 사사를 통해 하나님의 이끄심과 보호하심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며, 인간의 강함은 어떤 것도 유익을 줄 수 없음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성경의 모든 기록들은 오늘날에도 어떻게든 우리의 삶 곳곳에 녹아있는 하나님의 그 메시지를 우리가 보고, 그런 하나님의 의도를 듣고, 깨닫기 원하시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사사임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 연약했던 시대의 방랑아 삼손을 보며 오늘 우리 각자의 세포마다 녹아있는 미성숙한 DNA가 더 이상 하나님의 걸림돌이 아닌, 디딤돌이 되어 정말 멋지게 사용되기를 간절히 소망해 봅니다.

깊이 있는 대화가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기본 중 하나는 기도입니다.  
심지어 우린 이 기도를 향해서 ‘호흡’이라는 표현까지 씁니다. 

호흡이 멈추면 몸의 모든 기능에 문제가 생기듯 기도가 멈추게 되는 순간 삶의 전반적인 부분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하나님을 의지해서 하나님의 방식으로 사는 사람들을 일컫기에,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런 기도는 단순히 음성을 듣는 것 외에도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끊임없이 확인하고 그 확인을 통해 더욱 세밀한 인도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의 본질은 듣는 기도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대화도 일방적으로 나의 얘기를 늘어 놓기만 하는 경우 더 깊이 있는 교제나 나눔이 될 수 없듯이 내가 하고 싶은 말만 일방적으로 떠들어 대는 그런 기도는 어쩌면 보통의 종교인들이 하는 주문과 다를 바 없는 무익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가 성숙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이 됩니다. 

이런 기도의 삶을 살게 되면 어디서나 하나님과 진정한 대화가 가능하기에 특정한 시간과 장소를 넘어서는 확장성과 영향력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삶의 현장이 그곳이 어디라도 그때가 어느때라도 전혀 상관없이 조금도 방해되지 않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최선의 장소가 됩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진정한 대화를 지금 시작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ALL GENERATIONS CHURCH, 147-08 BAYSIDE AVE, FLUSHING, NY 11354   (718) 335-7035   ONSEDAE1@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