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는 눈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창세기를 보며 인간타락은 곧 [안목타락]을 얘기합니다. 
사람은 그때부터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고', '봐야 할 것들을 전혀 보지 못하는 눈'이 되어버립니다. 

그런 타락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의 삶 곳곳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1) 봐선 안되는 것들을 보며 헤어나오지 못합니다.
2)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인도하심을 봐야 하는데 보지 않으려 합니다. 

이런 [안목타락]은 끊임없이 세상 사람들의 눈을 자극하고,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들, 즉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들 또한 자극합니다.

우린 날마다 이 눈 지키기 위해 말씀 앞에 모여 그 기준을 지속적으로 제시 받습니다. 
하지만, 관계의 묶임은 심지어 하나님의 자녀들 조차도 묶어 버리고 헤어 나오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왔던 그 결정적 원인은 <눈>이었습니다. 


[창세기 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그래서 <죄>도 눈으로 들어오고, <은혜>도 눈으로 들어옵니다. 
이번 고난주간은 더욱 영적으로 구별된 시간으로 채워 성령안에 날마다 복된 것만을 바라보는 그런 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날마다 십자가를 생각하고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깨닫고 감사하며, 하나님을 찾지 않았던 우리들의 삶에 잃어버렸던 주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바벨탑 쌓기 금지

창세기에서 <노아홍수사건>이 있고 노아의 자녀들을 통해 확산된 후손들 안에는 모든 인류가 어디를 가든 가지고 있는 [홍수에 대한 기억]이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전세계에 흩어져 증명되고 있는 [홍수설화]는 이를 대변해 주기에 충분합니다. 

물론 사람들의 그런 기억들은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를 이해하고 설명해 주는 좋은 기능을 했겠지만, 반대로 항상 부정적 유전자(DNA)를 가진 또 다른 인류는 아예 더욱 적극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완벽히 탈출해야겠다는 무모한 시도를 합니다. 

‘얘들아, 우리 이번만큼은 완벽히 하나님을 떠날 수 있어’
‘보다 더 확실하게 하나님의 진노를 벗어날 수 있다구’
‘하나님 없이도 우린 얼마든지 더 강해질 수 있다니까’ 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시작된 일이 [바벨탑 쌓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혼나고도 정신 못차리는 것이 꼭 우리네 모습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간이 오래 지나면서 [홍수심판]은 아주 희미한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엊그제 일이었다면? 감히 그런 시도를 또 다시 하지 않았을텐데...
성경은 항상 <사건중심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분명 홍수 이후 바벨탑 사건까지의 시간은 꽤 많이 지나 기억이 가물가물 하니까 이젠 아예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지 않는 성도가 가장 겁이 없는 분>입니다. 
뭐든 다 가물가물해 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혼난 기억이 어제 일처럼 분명하다면 같은 행동을 되풀이 하겠습니까?
처음엔 그냥 상상으로 시작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냥 뭐 그렇게 하면 어떨까?' 그게 바로 [바벨탑 쌓기 계획]이었습니다. 

혹 우리 중에 이런 <바벨탑>을 쌓을 계획과 이미 쌓고 계신 분이 계신가요?
내 삶에 하나님 없애는 선택은 결국 당시 언어만 혼잡케 된 것처럼 엄청 불편함을 낳는 결과만 가져옵니다.

 

그러니까 "이제 그만! 바벨탑 쌓기를 멈추세요!!!"

 

사랑 때문에...

늘 그렇게 사람들 때문에 마음 아파했던 하나님...
그 정도로 많이 아프고 그 만큼 배신 당하셨으면 그만 사랑할 법도 한데,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하나님의 그 마음...
그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하나님 자신이 약속에 신실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보다 결코 감정이 앞서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죠.

성경 곳곳에 보면 우리와 비슷한 <하나님의 감정언어>가 있습니다. 
때론 너무 사랑스러워 하시고, 너무 무섭고, 때론 분노하시고, 아파하시는...
그런 모습들을 표현한 부분들 말입니다. 

이런 모든 <감정 언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사람인 우리와 결정적으로 다른 부분이 있지요. 어쩌면 바로 이 부분이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따르고 신뢰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보다 더 섬세하고 세밀한 감성을 갖고 계시지만, 결코 어떤 경우라도 감정적으로 응대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의 배신으로 온 지면에서 인간 자체를 다 쓸어버릴 때도 하나님은 하나님만의 규칙을 정하십니다. 끝까지 기회를 주셨다는 사실이지요. 

감정적인 존재는 분노한 감정 앞에 선처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기다림이란 더더욱 있을 수 없지요. 오직 진노와 보복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무려 방주를 지을 때까지의 시간인 120년을 기다리십니다. 
그것은 진노가 목적이 아니었고, 단 한 사람이라도 깨닫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노 중에라도 결코 감정적이지 않은 분이십니다.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시기에 더욱 담대히, 그리고 흔들림 없이 그 하나님 신뢰할 수 있습니다.
우리 온세대 가족 모두 반드시 그 하나님을 꼭 붙드시길 바랍니다.

기질이 가져온 영향력

사람은 틈만 나면 하나님을 떠나려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게 만들어 놓은 하나님의 그 <완벽한 창조> 때문입니다. 

[창11장]은 노아와 그의 가족을 시작으로 하나님은 새로운 인류를 향한 새로운 약속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이후 그렇게 또 많은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 사이에는 여전히 부정적인 DNA가 꿈틀거리며 하나님을 가장 많이 닮았지만 하나님을 가장 쉽게 멀리하는 속성이 꿈틀거리게 됩니다. 마치 오늘날 사람들처럼...

 

우린 노아의 세 아들(셈, 함, 야벳)의 반응을 보면서 '한 배에서 태어나도 사람마다 참 그 성향이 다르구나'라는 생각과 동시에 각 사람의 그 성향이 삶을 결정짓는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노아가 술에 취해서 바지까지 벗고 널브러져 있던 그 사건‘ 때문에 서로 다른 자녀들의 성향을 자극하게 된 것이죠. 
 
어떤 자녀는 상대의 치부를 드러내고 떠들어 댔지만, 반대로 어떤 자녀는 상대의 치부를 가려주고 숨겨주는 자가 있었습니다. 그 결과 자녀의 선택이 아버지의 축복과 저주라는 극단적인 결과를 가져오기까지 합니다. 


이유야 어찌됐든, 남의 치부를 드러내는 함의 행동과 그 반대인 셈과 야벳의 결론은 완전히 달랐다는 것을 우린 기억하고 있습니다. 

사람 속에 있는 부정과 긍정, 선함과 악함의 유전자는 여러 세대를 거치며 발전되고 사라지고를 반복합니다. 그리고 심지어 또 다른 모습으로 발전되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로 볼 때, 우리가 가지고 태어나는 모든 기질과 성향들에 대한 책임이 결코 부모에게만 있다고 볼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도 우린 나의 기질을 넘어서고, 나의 성향을 넘어서서 멋진 선택을 시도하는 그런 책임있는 삶을 선택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