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단과 목적의 차이

중세시대 독일 경건주의 수도사요, 
후대에 감리교 창시자였던 존 웨슬리(John Wesley)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던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à Kempis, 1380년 ~ 1471년 7월 25일)는  "지혜로운 연인은 사랑하는 사람의 선물보다 그 사람의 사랑을 더 가치 있게 여깁니다” (A wise lover values not so much the gift of the lover as the love of the giver) 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당연한 일이겠지만,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매우 중요한 이 사실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과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은 분명 다릅니다.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사람은 자신의 목적과 목표를 위해 하나님의 도움이나 능력, 즉 하나님의 손을 필요로 하기에 주시는 선물에 집중합니다.
그렇다보니 때론 그 선물 때문에 맘이 상하고, 또는 오해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은 하나님 자신을 원하기 때문에 선물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더 집중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 무엇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더욱 알고자 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항상 하나님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찾습니다. 
늘 그분을 의식하고 인식하고 어떻게해서든 오고가는 내용보다 그 관계 자체를 더 중요시 여깁니다. 

코로나는 어쩌면 그동안 하나님을 수단으로 여겼던 사람들에겐 '더 이상 필요없는 분'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관계로 이해하고 목적으로 바라볼 때는 환경과 상황이 가져다 주는 문제나 심지어 감정의 문제조차도 하나님과의 관계에 영향을 주는 그 무엇인가가 되지 않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을 목적으로 삼고 더욱 하나님과의 관계를 중요시 여기는 온세대가 되기를 바랍니다. 

 

‘남은 자’ 思想

우린 지금 대부분 캄캄하고 긴 어둠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몸도 마음도 지쳐가고 있는 것 같고 노력하는 일에는 아무런 결과도 보이지 않는 것 같으며 심지어 기도응답은 점점 더 저만치 멀어져만 간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해 뜨는 시간이 확실히 가까워진 것입니다. 

이 시간은 분명히 지나갑니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이삭을 낳기 전 가장 어두운 절망의 때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이제는 아브라함 자신도, 아내 사라도,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석해주고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기 직전에 인생에서 가장 춥고 캄캄한 감옥에 갇혀서 20대 젊은 시절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것도 너무나 억울하고 수치스러운 누명을 쓴 채 말입니다. 

그러나 모든 고통에는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분명히 해는 뜨고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신 일들은 이루어집니다.

해답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과연 누가 끝까지 견디는가?’ 입니다. 

성경은 이를 남은자(remnant) 사상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단순히 ‘찌꺼기’ ‘나머지’의 의미가 아닌, 약속을 믿고 극심한 현실을 견디어 낸 하나님의 자녀들을 말합니다. 

이 시대에 진정한 ‘램넌트(remnant)’가 되어 결국 약속을 얻어 승리하는 복된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누에고치를 억지로 날게 할 수 없습니다

누에고치에는 바늘 구멍만한 틈이 있습니다. 
나비가 되어 나오기 위해 그 틈을 통해 나오는데 꼬박 한나절을 애씁니다. 
그 힘든 과정을 치르고 나와야 보로소 화려하게 하늘을 날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누구라도 그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 누에고치에 구멍을 뚫어주게 된다면 그렇게 쉽게 나온 나비는 결국 날지 못하고 죽어버립니다. 

좁은 구멍을 나오려는 발버둥과 몸부림이 나비를 강하게 하고 환경을 적응할 힘을 갖게 한다는 것을 우리는 모릅니다. 


힘든 고난이 날개 근육을 강하게 만들고 각각의 기관을 제대로 형성하토록 돕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과정없이 연단과정 없이 나오는 나비는 적응력과 자생력을 완전히 상실한채 도태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시련, 고난, 역경...
결코 이러한 현실은 누애고치에만 해당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에게 너무나도 필요한 과정일 수 있습니다. 
그 과정은 과정 자체가 목적이 아닌, 앞으로 우리 각자에게 주어질 환경에 대한 적응력이요,   내 스스로를 지탱해줄 자생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이해할 수 없는 도무지 납득이 안되는 상황을 우린 자주 만납니다. 
하지만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이 과정이 나를 만들고, 미래를 준비하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결코 우린 그러한 관점을 잊지 않을 때 지금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이 감사의 이유요, 숨겨진 하나님의 목적임을 알게 됩니다. 

 

‘이미(Already)’ 그러나 ‘아직(Not yet)’

하나님의 나라는 2000년 전,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이미' 이 땅에 시작되었습니다.
물론 사탄은 당시 여러 방법들을 총동원해서 그 사건을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했지만 누구도 그런 하나님의 계획을 거스를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시작된 위대한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재림) 완전히 이루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바로 그 마지막 때를 기다리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개인적인 종말(죽음)이든, 우주적 종말(재림)이든 믿음이란 '지금' 여기에서 '그 마지막 때'를 기다리며 사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를 바라보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지금의 '이 때'를 결코 소홀히 아무렇게나 살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서 있는 곳에서 지금이 마지막 시간인 것처럼 우리가 맡은 본연에 일에 더욱 충실합니다.

나중에 더 잘 할 수 있으리라는 핑계는 더 이상 통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시간이 그렇게 많이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일로 분주하기 보다는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내 삶의 우선순위에 두고 이제 각자 더욱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며 준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 된 의무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복된 삶인 줄 믿습니다.

마라나타~
(주님의 다시오심을 기다리며...)

 
 

어설픈 죽음이 모두를 힘들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6장 8절에서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죽지 않았다면 그리스도와 함께 살지 않는 사람입니다. 

죄보다 무서운 것은 죽지 않은 자아입니다. 
자아가 죽지 않은 채, 열심만 있으면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방해할 뿐입니다. 

요즘 너무 많은 기독교인들이 복음에 대한 좌절감, 무력감에 무너지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무너짐과 좌절감은 결코 코로나로 인해 우연히 찾아온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미 예견되어 있었고, 우리 속에 충분히 잠재되어 있던 것들이 뿜어져 나왔을 뿐입니다. 

십자가 복음이 무능해서가 아니라 진정한 십자가 복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제대로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코로나는 우리에게서 결코 열정을 빼앗아 가지 못합니다. 
열정이 식고, 감사가 살아졌다는 것은 이미 내 속에 감추어져 있던 나약함이 견디다 못해 실체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 지난 우리 모든 믿음의 선배들이 겪었던 현실은 오늘날 우리가 만나는 가장 극렬한 그 어떤 문제들 보다 치열하고 처참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믿음은 오히려 고난과 역경 속에서 더욱 강해졌고 열매를 맺어갔습니다. 

십자가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구원의 문을 열어 놓았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이들을 위한 '위대한 배려'도 내가 받아 누리지 못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로 죽고 예수로 사는 것은 옛 자아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었고, 예수님과 함께 새 생명으로 천국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희생도 없고, 헌신도 없는 오늘날 종교생활에서 죽고 생명을 소유한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시는 그날까지 내 열정 모두 쏟아 붓고 혼신을 다하는 복된 삶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얼마만큼 더 보여줘야 믿겠습니까?

아브라함이 86세에 이스마엘을 낳은 것은 하나님의 약속(말씀)만으로 결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지 못하고 인간적인 방법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물론 처음 부르심을 받고 지난 11년은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닙니다. 
하지만 기다리지 못한 불신앙은 결국 이스마엘이라는 불행의 씨앗을 낳게 됩니다. 
그리고 그 불행으로 인한 갈등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믿음 없음으로 인한 결과는 잊지 못할 아픔으로 다가올 수 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우리의 삶이 힘든 것은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하지 않고, 세상을 자꾸 기웃거리며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필요하지만 다른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4장에 보면 베드로가 풍랑 중에 물 위를 걸어오시는 주님을 보고 뛰어내려 예수님만 바라보고 물 위를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바람을 보고 성난 파도를 보는 순간 믿음이 흔들리고 두려움이 생기면서 걷잡을 수 없이 물속으로 빠져 버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언제 광풍이 불어올지 모릅니다. 
그러나 두려워할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께 시선이 고정된 삶은 바람이 불든, 태풍이 불어오든 환경을 뛰어넘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뭐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다소 바보스러워도 꾸준히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예수님만 바라보는 믿음이면 충분합니다. 
결국 그곳에 승부가 있습니다. 

진정한 인내

인내(忍耐)는 참는 것을 말합니다. 
어거스틴은 '인내는 지혜의 동반자'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곧 인내하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요, 인내하지 못하는 사람은 지혜가 부족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우린 누구나 삶의 현장에서 인내를 필요로 하는 상황을 만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것 중 하나가 인내입니다. 

한두 번 인내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온전히 인내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인내는 단순히 성격을 다스리고, 화를 참으며, 대인 관계성에서 오는 모든 것들을 다스리는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인내는 자신과의 약속과 닥친 상황을 이겨내는 모든 것들을 말합니다. 

온전한 인내는 끝까지 참는 것입니다. 
어제까지 참았다고, 그리고 수년을 참아왔다고 온전한 인내를 이루었다고 말하진 않습니다. 

그래서 인내를 온전히 이루었다는 것은 끝까지 참아낸 사람에게만 해당됩니다. 
그것이 진정한 성숙입니다. 

성경은 "인내하는 자는 복되다"(약5:11)고 말씀합니다. 
인내하는 자에게는 복이 임합니다. 
그것은 인내하는 사람만이 얻는 삶의 선물입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 중에 결국 뭔가를 이뤄낸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들은 누구나 이 인내를 이룬 사람들이요, 
그것을 끝까지 견디어 낸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 전 순간까지 참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결과와 열매를 볼 때까지 참아내는 삶, 
극복하는 삶...
그것이 진정한 인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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